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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

[도서 리뷰] 기독교 원죄설을 비판하다 를 읽고

오늘은 기독교 원죄설을 비판하다에 대한 도서 리뷰입니다.

공격성 제거 불가능성

공격성 제거 불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지지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원죄설이 깔리워져 있다. 이 원죄라는 것은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은 후세 기독교 학자들의 주장인 데 그 핵심 내용은 인간은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이브)의 범죄로 말미암으로 생긴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지울 수 없는 죄에 의해 운명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삼위일체에 - 성부(유일신), 성자(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성부의 능력을 전달하는 일종의 힘 혹은 능력) - 의해서 인간은 유일하게 이러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신학적 설명인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러나 꼼꼼히 따져보변 그렇게도 황당한 논리에 대해 신학적으로 따져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 릉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논리 제공의 원조라고 판단하여 말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헬레니즘적인 사고

먼저 원죄(Origianal Sin)는 신정사회(Theocracy)를 염원한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의 바람이 투영된 인간에 대한 굴레 씌우기 이론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쉽게 말하면 원죄라는 틀로서 인간을 규정하게 될 때에 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이때에 신의 일꾼인 성직자들이 "짜잔'하고 나타나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인간을 이러한 원죄로부터 구원해주는 극적인 구사를 염두에 두고 제공된 이론이라는 말이다. 조금 진지하게 표현하자면 초기 기독교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원시성을 벗고자 헬레니즘적인 사고를 끌어와 철학화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정식으로 로마의 승인을 끌어내게 되었을 때에 본격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대한 정치적 선택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러한 정치적 선택으로서 그들이 성직자 중심의 신정 사회를 염두에 두었을 때에 성직자 체제에 함 당한 규정 논리로서 인간의 원죄설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존에 대한 기독교의 부정적인 태도

그래서 중세에는 원죄를 씻을수 있는 신의 일꾼으로서의 성직자의 권위가 그렇게 놓았던 것이어서 천 년 동안이나 유럽을 성직자 중심 체제라는 큰 틀 안에서 유지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창세기적 인간에 의해 시도된 인간의 거친 생존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 인간의 지울 수 없는 죄로 둔갑이 되자 이제는 인간의 생존 자체가 죄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히브리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통해 어떻게 인간이 생존이라는 거친 실존적 삶으로 던져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데에 반해 초기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삶을 인간의 죄로 묶어 세워 어떻게 신정 사회를 세울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다는 것이고 결국에는 인간의 실존이 성직자 중심의 신정 정치 안에 묶에 세워 두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 방편으로서 사용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에 대한 기독교의 부정적인 태도는 결국 중세적인 틀 안에서만 지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영역이 교묘하게 위장된 채 이후 근세와 현대 사회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데 인간의 실존을 어떤 넘을 수 없는 본능에 바탕을 두고 영위하는 존재로 묘사하여 여전하게 이 시대에도 어떤 성직자 체제를 준수하게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욕망 추구

인간의 천형인 원죄는 중세에서는 신정정치를 위해 존재했지마는 이제는 원죄가 아닌 '씻을 수 없는 무엇'이 인간을 작동하여 계속적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돌진하게만 만드는 어떤 미친 존재로 인간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굴레 씌워진 신정정치의 틀을 인간 스스롱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간신히 벗어나기는 했으나 인간에게 굴레 씌워진 '제거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은 인간 뇌리에서 제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인간의 행동반경 속에 남아 있어 오직 강한 무기가 추동하는 대로 모든 세계가 방향도 모르고 질주하는 형국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중세의 신정정치적 정치 질서를 원하지 않거나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욕망 추구를 바라지 않는다면 기독교 원죄설은 극복되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의 실존 자체를 우리는 죄라고 규정할 수도 없고 맹목적인 욕망 추구의 상태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름의 모든 이론은 그것이 아무리 황당하다 하더라도 나름의 역사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원죄설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시대착오적인 인간에 대한 규정이 아직까지 버젓하게 살아 있는 것은 그 정도로 인간 사회가 아직까지 중세적 규정 틀이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논의의 핵심은 어떻게 욕망을 추구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욕망을 나누느냐는 데에 있다. 원죄설도 결국은 나누기보다는 왕권과 그것과 결탁한 기독교 세력의 독점에의 열망이었으며 현재의 ' 욕망 그 무엇'에 대한 방관도 '욕망 그 무엇'을 마음껏 얻은 이들의 승리의 찬가 이상은 아니다. 언제나 이러한 소리가 먹혀드는지 이 글을 쓰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이다.

기독교 원죄설을 비판하다를 읽고 느낀점을 서술해보았습니다.